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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밤 풍경

평론가 황현산의 산문집 제목처럼, 이 두 명의 사진가에게도 밤은 선생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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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ADSIDE LIGHTS  

EIJI OHASHI

이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발명품이 됐지만, 일본에서 자판기라는 존재의 의미는 좀 남다르다. 책, 다코야키, 아이스크림, 안경 등 웬만한 생필품은 모두 자판기로 해결할 수 있는 일본은 그야말로 ‘자판기 왕국’이니까. 낯선 이방인에게 특히 신선한 구경거리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야외 자판기는 사실 일본인에게도 다양한 감흥을 일으키는 존재다. 사진가 에이지 오하시가 나고 자란 곳은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다. 혹독한 추위와 비현실적인 강설량으로 유명한 이 도시에서 그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밤 길을 잃는다. 한참 헤매던 그가 어둠 속에서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자판기 불빛이었다. 이후 눈 속에서 빛나는 형광빛 조명을 볼 때마다 그는 마치 자판기가 “괜찮다, 괜찮다” 속삭이는 것 같다고. 일본의 자판기는 대부분 야외에 설치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일본인들은 자판기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사실만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고 한다. 크고 작은 지진과 폭풍, 폭우 같은 자연재해에 노상 시달리는 그들에게 전원이 켜진 자판기는 말 그대로 청신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에이지 오하시는 이렇게 회고한다. “무릎까지 눈이 쌓이면 눈밭을 헤치고 자판기 앞에 섭니다. 도저히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도시 한가운데서도 자판기는 어김없이 빛나고 있죠. 그리고 제게 따뜻한 음료 한 캔을 건넵니다. 손에 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일본인만의 이상한 태도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온기를 느낄 때마다 사람들이 지장보살에게 씌워주는 털모자가 생각나요. 아이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마을 곳곳에 세워둔 지장보살이요. 겨울이면 보살이 추울까 봐 털모자를 씌워주거든요.”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자판기도 그중 하나였다. 변화는 곧 ‘사라짐’을 의미했다. 원자력발전소의 안정성이 논란이 되자 전국적으로 불필요한 전기 공급량을 줄여야 했던 탓이다. 때마침 수익률이 낮아 골칫거리로 여겨지던 야외 자판기를 없애야 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던 시기였다. 에이지 오하시가 야외 자판기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온 나라에 불이 켜질 때, 자판기에도 불이 들어옵니다. 지극히 평범한 골목 어귀에서 자판기가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은 일본만이 지닌 특별한 풍경이죠. 황무지, 설원, 도심 한가운데. 그곳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자판기들이 마치 내게 외로움을 고백하는 것 같았어요. 모든 자판기는 자기만의 색과 빛을 가졌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듯이 말이죠.” 이제는 자리를 비웠을지 모를 자판기 사진을 보내며 그가 덧붙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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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GHT SERIES  

Simon Åslund

혹자는 ‘스칸디나비아 누아르’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로 복지 제도의 그늘에 가려진 소외 계급의 범죄, 과거 독일 나치 시절의 청산되지 못한 역사, 정치인의 부패 등을 언급한다. 물론 북유럽 국가 사이에도 저마다 복잡한 역사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확실히 ‘스칸디나비아 누아르’라 불리는 작품 전반에는 특유의 축축하고 서늘한 서스펜스가 있다. 이 장르에는 스웨덴 출신 작가가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발란더 형사’를 탄생시킨 스릴러 문학의 거장 헨닝 망켈, 전 세계 9000만 부 이상 팔리며 데이비드 핀처가 영화로 제작한 <밀레니엄 시리즈>의 원작자 스티그 라르손, 한때 스웨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던 <폭파범>의 작가 리사 마르클룬드까지 모두 스웨덴 출신이다. 이처럼 스릴러의 대가들을 줄지어 언급한 이유는 지금도 스톡홀름 골목을 배회하며 펜 대신 카메라를 들고 자기만의 스릴러를 찍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23세의 포토그래퍼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시몬 오슬룬드다. 작가는 친구로부터 우연히 아날로그 카메라를 건네받은 계기로 사진을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주변의 일상적 풍경을 처음부터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포착했다고 기억한다. 우울함과 으스스한 기운이 묻어나는 그의 사진을 본 사람들이 주로 어디서 어떻게 셔터를 누르느냐고 물으면 그는 매번 이렇게 답하곤 한다. “대부분 스톡홀름과 달라르나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하지만 밖에 나서기 전 ‘오늘은 어디에 가서 어떤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냥 카메라를 들고 문 밖에 나갑니다. 그리고 밤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죠. 이런 방식이 외려 저를 가장 흥미로운 장소로 데려다주거든요.” 약 1년째 진행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Night Series>다. 사진에 등장하는 요소는 단 세 가지. 빛과 어둠, 어딘가로 향하는 인간의 뒷모습이다. 시몬은 모든 사진을 밤에만 촬영한다. 해가 지고 네온 조명이 도시를 비추는 밤이면 필연적으로 누구나 창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안개 속을 배회하는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가 다시 답했다. “정해진 건 없어요. 당신이 상상하는 그 누구도 될 수 있죠. 어쩌면 밤의 그림자, 또는 동떨어진 영혼일 수도 있겠네요.” 시네필을 자처하는 작가는 <더 랍스터> <송곳니>로 유명한 그리스 영화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열렬한 팬이지만,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영감을 얻은 건 대부분 스릴러 영화였다. 가령 캐나다의 스릴러 영화 <비욘드 더 블랙 레인보우>나 <파고> 시리즈처럼 스산한 분위기로 말초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작품들 말이다. 그는 <Night Series>의 모든 사진이 스릴러 영화의 첫 장면처럼 느껴지길 원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카메라를 들고 스톡홀름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이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사진가가 되고 싶은가’라는 진부한 질문을 건넸다. 대답은 스웨덴 시간으로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야 메일로 도착했다. “저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타고난 포토그래퍼로 여기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요. 그저 네온 빛에 중독된, 일종의 밤의 단골손님일 뿐입니다.”
 

 


주현욱(피처 어시스턴트 에디터)

출처 루엘 201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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