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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구름 위의 레이스

156개의 커브로 구성된 19.9km의 길을 따라 달려 해발 4301m의 결승선을 통과한다. 세계 최고의 산악레이스인 파이크스 피크 인터내셔널 힐 클라임은 그 어떤 레이스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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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스포츠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빠르면 장땡이던 레이스도 이젠 다 옛날 얘기다. F1 그랑프리든, 르망24 내구레이스든 환경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배기가스 배출만 줄인다고 될 일도 아니다. 레이스를 더 재밌게 만든다는 명분 아래 코스를 가혹하게 재설계하고 규정은 점점 더 엄격하게 들이대는 까닭이다. 하지만 무려 100년 넘도록 원래 모습과 진행 방식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대회도 있다. 1916년 첫 레이스를 시작한 파이크스 피크 인터내셔널 힐 클라임이다. 매해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뻗어나가 로키산맥 끝자락에서 펼쳐지는 이 대회는 세계 최고의 산악레이스로 악명 높다. 룰은 단 하나다. 누가 누가 더 빠른가? 냅다 달리면 되니까 간단해 보이겠지만, 사실 스피드를 내기엔 이 대회만큼 치명적인 악조건도 없을 것이다. 그 조건의 핵심이 바로 고도(高度)다. 경기 스타트 라인이 무려 해발 2792m에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백두산 꼭대기보다 50여 m 높은 곳에서 시작해 평균 경사 7%에 달하는 구간을 달리며 해발 4301m까지 올라가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레이스가 펼쳐지는 동안 날씨가 수십 번 바뀌는 건 예삿일이다. 비와 바람, 구름은 물론 한여름 초입임에도 눈보라를 만나기도 한다. 날씨가 이렇다 보니 드라이버의 체력과 컨디션에도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중도 포기 사례가 넘쳐날 수밖에 없다. 심지어 2012년에 펼쳐진 무제한급에서는 결승에 진출한 일곱 대의 차 중 다섯 대가 포기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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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장애물은 산소포화도 변화다. 평지에 있는 트랙과 비교할 때 이미 출발선부터 공기 중 산소 함유량이 35% 이상 떨어진다. 이 정도면 100m를 전력 질주한 드라이버에게 곧장 차에 올라 레이싱에 임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것도 계속 무전기에 대고 쉴 새 없이 떠들면서 말이다. 파이크스 피크 인터내셔널 힐 클라임의 애로 사항은 단지 드라이버의 호흡이 가빠지는 수준의 문제를 넘어선다. 엔진이 연료를 태울 때 필요한 공기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차를 움직이는 출력도 제대로 못 쓰게 된다. 또 공기 무게도 가벼워 차를 내리누르는 다운포스도 현저히 떨어진다. 파이크스 피크 인터내셔널 힐 클라임에서 지금까지 나온 최고 기록은 8분 13초 878이다. 지난 2013년 무제한급에 출전한 세바스찬 롭이 푸조 208 T16 파이크스 피크를 타고 펼친 레이스에서 기록한 결과다. 당시 평균 시속은 145km였다. 이런 속도를 내며 산꼭대기로 내달려야 하는 만큼 다운포스는 차의 안정적인 주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다. 1916년, 첫 대회가 열릴 때만 해도 종목은 오픈휠 타입 자동차가 유일했다. 현재 펼쳐지는 대회는 전기차를 비롯해 자동차에만 12가지 종목이 있고 모터사이클도 10가지로 쪼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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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회는 6월 24일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여느 해와 달리 열띤 취재 경쟁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유는 폭스바겐과 벤틀리의 참전 때문이다. 먼저 포문을 연 건 폭스바겐이다. 디젤 엔진으로 큰 타격을 받은 상황을 돌파하는 모멘텀으로 삼으려는 듯 순수 전기 슈퍼스포츠카인 I.D. R 파이크스 피크로 참가한다. 최고 출력 680마력, 최대 토크 66.3kg·m인 전기모터로 무게가 겨우 1100kg에 불과한 차체를 움직인다. ‘제로백’은 2.25초. 앞서 말한 것처럼 내연기관차는 산악레이싱에서 산소포화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반면 전기차는 산소의 영향에서 자유롭다. 대신 배터리가 승부를 결정짓는다. 폭스바겐은 이를 위해 높은 출력을 안정적으로 뽑아내는 배터리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력량은 물론 6월 말에도 종종 영하로 떨어지는 환경에서도 배터리 효율이 일정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또 달리면서 충전이 가능하도록 회생제동 시스템을 개발해 레이싱에 필요한 에너지의 20%는 주행 중 만들어낼 수 있게 했다. 푸조, 포르쉐, 아우디의 르망 드라이버로 활약했던 로맹 뒤마가 운전대를 잡는다. 그는 파이크스 피크에서 세 번이나 우승한 경력이 있다. 벤틀리 벤테이가의 출사표는 더욱 인상적이다. 럭셔리 SUV가 왜 이런 가혹한 레이스까지 참전을 선언했을까 라는 의구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들여다보면 단지 이슈 메이킹용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벤틀리 모터스포츠 팀이 튜닝했다는 차는, 말이 손을 댔다는 것일 뿐 대회 안전 규정 준수에 그치는 수준이라 놀라움을 안겨줬다. 600마력 최고 출력에 91.8kg·m 최대 토크를 내는 W12 엔진과 에어서스펜션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갖고 나왔다. 일반 양산차와 다른 건 전복 사고를 대비한 롤케이지, 화재 사고 방지를 위한 소화기, 그리고 레이싱 시트뿐이다. 물론 피렐리의 전용 타이어와 컨티넨탈 GT3-R에서 이미 선보였던 가변 배기 시스템도 다르지만 레이스 조건을 떠올리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니까 ‘우린 순정 상태로도 파이크스 피크 따위는 식은 죽 먹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싶어 찾아보니 벤테이가를 몰 레이서는 리스 밀런이다. 역시. 그는 파이크스 피크 챔피언이자 레드불 모터스포츠 선수로도 활동한 사나이다. 벤틀리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브랜드가 내놓은, 그리고 비슷한 게 아무것도 없는 두 대의 머신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어쩌면 당신이 <루엘>을 읽고 있는 지금쯤이면 뭔가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에디터 이재림

출처 루엘 201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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