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본문영역 바로가기
닫기
HOME LUEL ENJOY

SPORTS

두산 팬 롯데 팬 한화 팬

리그 수준과 선수들의 실력에 대한 품평은 냉온탕을 넘나들지만, 한국 야구의 인기가 독보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천만관중 시대를 눈앞에 둔 팬심에는 어떤 결들이 숨어 있을까?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 유별나기로 소문난 두산, 롯데, 한화의 팬심의 연대기와 차이점에 대해 캐묻고 다녔다.

1.jpg

곰들의 신화, 미라클 두

두산 베어스

한국프로야구 1호 팬은 누굴까? 물론 ‘팬’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공식적으로 한국프로야구 1호 팬은 두산 베어스의 팬이다. 1982년 1월 15일 출범한, 프로야구 첫 번째 구단이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 베어스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 앞서 일단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야구 팬이 되는지를 짚어봐야겠다. 한국프로야구는 지역연고제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연고지가 있다. 애초 프로야구가 ‘지역대항전’을 내세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경우는 어떨까. “걔들은 대전으로 돌아가라 그래요. 아니, 처음부터 잠실은 우리 거였다니까?” 골수 LG 팬이 두산 팬을 만났을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지는 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 베어스는 1982년 창단 당시 대전이 연고지였다. 당시 국가대표급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들은 주로 서울권에 많았는데, OB가 야구 구단을 맡기로 했을 때 서울 연고팀은 MBC 청룡으로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 결과 OB 베어스는 ‘3년 후 서울 이전 및 서울 지역 선수들의 3분의 1 분할’이라는 조건을 걸고 대전을 연고지로 구단을 출범시킨다. 하지만 그해, 모두의 예상을 깨고 OB베어스가 ‘한국프로야구 첫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간다. 그렇게 3년의 기간을 함께한 충청도 팬들 중 대부분이 여전히 두산을 응원하고 있다. 한 지붕 아래 두산과 한화 팬이 공존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되는 이유다. 반면 ‘외모 지향적’으로 구단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제가 야구를 한창 보기 시작한 때가 아마도 1994년? 1995년? 그때 ‘신바람 야구’ 하면서 LG의 인기가 참 좋았잖아요. 특히 여자 팬들한테. 예나 지금이나 LG에는 유독 잘생긴 선수가 많았죠. 서용빈, 김재현, 이대형 등등.” 18년 이상을 야구장에 드나들며 야구 기사를 쓰고 있는 현역 야구전문기자의 말이다. “두산 선수들은 뭐랄까. 좀 곰 같죠. 김현수 선수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것도 두산 ‘베어스’의 색깔과 잘 어울려서가 아닐까요?” 물론 이런 외적인 요소들을 차치하더라도, 야구 초심자에게 두산 베어스를 선택할 명분은 차고 넘친다. 특히나 2008 베이징 올림픽과 2009 WBC의 여파로 프로야구 팬이 급격히 늘던 시점부터 꾸준히 상위권을 지켜온 두산의 성적도 충성도 높은 팬을 유지 관리하는 데 한몫했다. “저는 두산 팬들 인정 못 합니다. 아니, 안 해요.” 해태 시절부터 타이거즈에 그 누구보다 충성해 왔다고 자부하는 어느 팬의 말이다. 놀랍게도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30대 야구 팬이다. “물론 박철순 시대부터 응원해오신 분들은 리스펙합니다. 암흑기도 함께 견뎌 왔으니까. 그런데 2008년 이후로 두산 팬을 자처하는 분들은 인정할 수 없어요. 두고 보세요. 그분들은 두산이 좋은 게 아니라 늘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강팀이 좋은 거예요.” 반면 한때 LG 팬으로서 두산을 오랫동안 보아왔다는, 18년 차 기자의 입장은 달랐다. “두산 팬들은 듬직해요. 괜히 마스코트가 곰인 게 아니라니까요. 항상 묵묵히 응원해주는 것 같아요. 그런 분위기가 선수들에게도 전해지겠죠. 선수단 내부에서도 옛날부터 분위기가 좋은 걸로 유명해요.” 두산 베어스는 지난 2009년부터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한 시즌 1백만 관중을 동원한 유일한 팀이다. 지난 10년간 관중 현황을 합산했을 때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한 것 역시 두산(2위는 LG, 3위 롯데)이었다. 단순히 숫자만으로 팬심을 판단할 순 없겠지만 두산 팬이 가장 많이, 그리고 꾸준하게 응원을 해온 건 사실인 것 같다.

 

마! 우리가 남이가?

롯데 자이언츠

“롯데가 4강에 가면, 부산 지역 고등학교 입학 성적은 다 망하는 겁니다.” <롯데 자이언츠 때문에 산다>라는 책을 쓴 김은식 작가가 야구 명문 부산고의 한 교사를 인터뷰할 때 들었던 말이다. 실제로 1991년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홈관중 백만 시대를 처음 열었던 팀이 롯데 자이언츠고, 역대 한 시즌 최다 관중 수(1,380,018명, 2009년) 기록을 보유한 것도 롯데 자이언츠다. 흥미로운 건 정반대의 기록을 보유한 것도 롯데라는 사실이다. 2002년 10월 19일. 한화 이글스와 경기가 있던 사직구장을 찾은 관중은 단 69명뿐이었다. 심지어 경기 당일은 롯데 자이언츠 로고가 그려진 옷이나 모자를 입은 팬은 무료입장이 가능한 이벤트 데이였는데, 충격적인 것은 69명의 관중 중 단 한 명의 티셔츠에서도 자이언츠 로고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날 사직구장에는 롯데 팬보다 롯데 선수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2002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승률 0.245%로 정규 리그 꼴찌를 기록한 최악의 해로 회자되곤 한다. ‘롯데 팬들은 성적이 안 나오면 경기장에 안 나간다’는 얘기가 그냥 소문만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성적만 나온다면 롯데 팬들은 그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야구장을 찾는다. 정규 시즌 7위를 기록한 2007년(759,513명)에서 3위로 도약한 2008년(1,379,735명), 정규 시즌 8위를 기록한 2004년(307,537명)에서 5위로 올라간 2005년(652,475명)이 그 대표적인 증거다. 하지만 이토록 들쑥날쑥한 관중 숫자를 비꼬며 부산 팬심을 ‘냄비 근성’이라 수군대는 이들도 많다. 이쯤 되면 ‘부산 팬들은 관중 숫자로 팬심을 표현해왔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백만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롯데 팬들이, 야구장에 발길을 끊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불참’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롯데 팬’ 하면 치킨 박스와 족발 뼈다귀도 회자되는 아이템 중 하나다. “원래 사직구장에는 원정 팬이 거의 없었어요. 교통이 편해진 요즘에야 좀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지리상 원정 팬이 많이 올 수가 없었죠. 그 넓은 사직구장에 롯데 팬만 3만 명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분위기가 뜨거울 수밖에 없죠.” 때론 그 열기가 넘치기도 했다. “한번은 사직구장에서 경기를 보는데 원정 팬 20명 정도가 3루 쪽 응원석에 모여 계시더라고요. 점차 승기가 원정 팀으로 기울기 시작하는데, 8회 초부터는 그분들의 안전 귀가가 걱정되기 시작하더군요. 예전에는 부산 아저씨들이 원정 팀이 모여 있는 곳으로 족발뼈를 그렇게 던졌어요. 스트라이크 존에 직구 꽂아 넣듯이. 그래도 당시에는 크게 뭐라 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어요. 상상해보세요. 20명 대 3만 명!” 김은식 작가의 회고다. 롯데 팬들은 기본적으로 야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자부심이 크다. 1940년대, 미군 부대 담장을 넘어 날아온 야구공과 버려진 배트를 주워다 놀던 때를 지나, 일본 방송이 잡히면서 일찍부터 일본 프로야구 경기를 접할 수 있었던 시절, 해방 직후 1946년 처음 열린 야구 대회인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가져간 것이 부산상고(현 개성고)와 경남중(현 경남고)라는 점 등 야구와 얽힌 부산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부산에서 야구는 종교다’라는 말이 허울처럼 들리진 않는다. “한국야구가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바로 롯데, 기아, 한화. 이 세 팀의 성적이에요. 원정 경기 동원력이 가장 높은 팀들이니까요.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서라도 롯데가 잘해줬으면 좋겠네요.” 18년 차 기자가 이번에는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전한다. 부산 사직구장에 가면 쉽게 들리는 말이 있다. “우리는 ‘롯데’ 팬이 아니라, ‘자이언츠’ 팬이다.” 유독 선수들에게 ‘짜게’ 굴었던 구단의 경영 방식에 서운함과 원망을 느껴왔던 자이언츠 팬들. 어쩌면 진짜 ‘보살 팬’은 원년부터 온갖 굴곡진 역사를 선수들과 함께 해온 자이언츠 팬들일지도 모르겠다. 그 자이언츠 팬들을 위해, 아니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서라도 ‘롯데 자이언츠’가 분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한화라서 행복합니다

한화 이글스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의 심정 아닐까요.” <한화 이글스 때문에 산다>라는 책도 쓴 김은식 작가가 ‘한화 팬은 왜 한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화 팬들의 한화 사랑은 가히 ‘아가페적’이라 할 만하다. 그들은 자랑한다. 우리는 이글스의 승패에 상관없이 응원한다. 그리고 노래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한화라서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정말 행복한 걸까? “30년 이상 된 팀들은 모두 황금기와 암흑기가 있어요. 한화도 창단 초기에는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 불리면서 상당히 화끈하게 경기를 치르곤 했죠. 한국시리즈도 자주 나갔고. 중간에 하위권을 전전했지만 1999년에는 한국시리즈 우승도 했고요. 그런데 그 뒤론 아시다시피….”  유독 길고 길었던 이글스의 암흑기. 그 어두운 세월 속에서도 한화 이글스가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다. 특히나 야구 좋아하기로 소문난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온갖 특효 처방은 다 써봤으니까. 김인식, 김응룡, 김성근 등 야구 명장들을 사령탑에 앉혔고, 선수 영입에도 적극적이었다. 김은식 작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화 김종희 회장 장례식 때 운구자가 8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지난해 한화의 감독대행을 했던 이상군이에요. 당시 중학생이었던 이상군을 대기업 총수가 직접 스카우트한 건 예나 지금이나 쇼킹한 일이죠. 이때 한화가 북일고에 야구부를 만들어 운영했고요. 북일고 출신들이 한화의 성골이라 불리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이처럼 구단에서 선수를 각별하게 대우하는 모습은 팬들에겐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영구 결번이다. 한화는 10개 구단 중 영구 결번 선수가 가장 많은 팀(장종훈 35번, 정민철 23번, 송진우 21번)이다. 달리 말해 한화는 팀에 기여한 선수를 쉽게 내친 일이 없고, 이런 ‘가족적’인 한화 구단의 분위기는 자연스레 팬심에도 영향을 미친다. ‘보살’로 여겨지는 한화 팬심이 ‘충청도 사람들이 원래 느릿느릿한 편이잖아요’ 식으로 설명해선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제아무리 ‘보살’이라 불리는 한화 팬들에게도 민심을 수습해줄 컨트럴 타워는 필요한 법. 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응원단장 홍창화다. “7~8년 쉬다가 올해부터 다시 야구장에 나오기 시작했어요. 감독님도 선수들도 얼굴이 모두 바뀌었더라고요. 그런데 유일하게 아는 얼굴이 있었어요. 우리 창화신이요. 그 얼굴이 어찌나 반갑던지.” 잠실에서 만난 한화 이글스 팬 소모임 ‘독수리 헤쳐 모여’의 신입 멤버가 한 말이다. 그 옆에 있던 ‘독수리 헤쳐 모여’의 또 다른 멤버가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창화신이 처음 응원단장을 맡은 게 2006년이에요. 그런데 2008년에 잠깐 SK의 응원단장을 맡은 적이 있거든요. 그때 창화신이 한화 경기 직관하러 갔다가 SK 팬들에게 들켜서 엄청 욕을 먹었다는 일화가 있죠. 이 사람은 진짜 ‘골수 한화 팬’이에요.” 올해 개인 통산 1000경기 응원을 기록한 홍창화지만 그 역시 아직 가을 야구 무대는 밟지 못했다. 지난 5월 22일, 무려 3661일 만에 단독 2위로 올라선 한화 이글스는 이 원고를 쓰고 있는 6월 16일에도 여전히 2위를 사수하고 있다. SK와 LG가 매섭게 쫓아오고 있지만 한화 역시 만만치 않다. ‘2018 프로야구 순위’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문득 인터뷰를 마치고 경기장에 들어가다 뒤돌아 소리치던 한화 팬의 말이 떠오른다. “오늘도 우리 한화가 이길 수 있게 응원해주세요!” 그 말에 밑줄을 그을 수 있었다면 ‘오늘도’, 그리고 ‘우리’에 했을 것이다. 2018년은 한화 팬들에게 엑소더스가 될 수 있을까.

 

 


주현욱(피처 어시스턴트 에디터)

포토그래퍼 신규식

출처 루엘 2018년 7월호

본 기사를 블로그, 개인홈페이지 등에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기사를 재편집하여 올릴 경우 발생되는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ud_line.jpg

  • 이벤트
  • 홈
  • 북마크
  • 정기구독신청
닫기